글

초승달

밤하늘에 초승달 떠 있고 중년 남자와 그림자 홀로 산책을 한다 그림자는 중년 남자를 따라오고 초승달은 그림자를 따라오고 중년 남자는 초승달을 따라간다 중년 남자가 그림자를 따라가든 그림자가 초승달을 따라가든 초승달이 중년 남자를 따라오든 무슨 대수랴 함께 있으니 좋으면 됐지 몸철학

이렇게 살다 죽는다면

퇴직 전까지 삼십 년을 돈돈돈 하며 살았는데 퇴직 후에는 건강건강건강 하며 사는 것 같다 여전히 너는 없고 그렇다고 나도 없고 몸철학

1993년 9월 5일

대학시절 둘도 없던 친구 용덕이는 낙산해수욕장에서 행방불명 됩니다 속초 앞 바다 어선 그물에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용덕이는 10km나 되는 바다 길을 파도를 타고 왔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님 누나들 그가 그토록 불쌍해했던 아버님 인생이 있는 고향 속초로 일주일 동안이나 파도를 타고 왔습니다 살아서는 가슴 아픈 시를 써서 사람을 울리더니 죽어서도 홀로 파도를 타고 고향에 찾아온 용덕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저립니다 28년이나 지났는데 그를 생각할 때마다 몸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생각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자주 웃던 얼굴이 생각나고 28년이나 지났는데 우리는 매년 9월이 되면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시비 앞에 섭니다 몸철학

시의 울림

시에 울림이 없으면 시가 죽는다 시에 울림이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를 쓰는 나부터 울림이 있어야 한다 나의 울림이 시의 울림이 되고 시의 울림이 우리의 울림이 된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말장난 하듯 시를 수만 번 고쳐본들 내가 쓴 시들은 여전히 죽어 있다 시에 울림이 없으면 시가 죽는데 시를 쓴다는 사람이 나부터 울리지 못하고 시를 쓰고 있으니 시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시가 나를 울게 한다 몸철학

너의 아픔이 느껴졌을 때

너의 아픔이 느껴졌을 때 너는 남이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아픔이 자라서 사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를 통해 알았다 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너를 통해 알았다 아!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너를 통해 알았다 너를 사랑하는 나만의 방식은 이렇게 늙어가는 것인가? 몸철학

들국화 1집

중학교 2학년 때 예쁘고 똑똑한 여자친구가 준 들국화 1집 테이프 그 후로 삼 년 동안 매일같이 들었는데 대학에 들어와 노찾사 양희은 김광석이 더 좋았지만 삼십 년이 지나 오십이 다 된 나이에 소주 한잔 걸치고 다시 들국화라니! 그 때나 지금이나 외로운 건 마찬가지고 내일을 위해 오늘 열심히 살자는 마음속 구호도 마찬가지고 가끔 땡땡이 친 후 두려움에 반성문 쓰고 열심히 자율학습 야근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매일 아침 자유를 꿈꾸는 것도 마찬가지고 부모님 생각도 마찬가지고 그때나 지금이나 들국화 노래가 멋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제길! 삼십 년이나 흘렀는데 다 똑같네 내 지친 몸뚱이만 빼고 몸철학

도마복음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이 저 하늘 위에 있다면 새가 먼저 가 닿을 것이요 천국이 저 바다 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먼저 가 닿을 것이다 천국은 저 하늘 위에도 저 바다 속에도 있지 않다 천국은 이미 와 있다 나와 나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몸철학

가장 귀한 말씀

예수님이 제자들과 밀밭을 걷고 있을 때 배가 고픈 제자들 중에 몇몇이 밀을 한 움쿰씩 걷어 씹으며 걸었다 이를 보고 성경을 통째로 외우던 바리새인이 안식일에 일을 한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당시는 율법의 일획도 어길 수가 없던 시절이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목숨을 지킬 수 없던 시대였다 그런 무서운 순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몸철학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나이 오십이 되어 생각해보니 나는 아마도 똑같은 잘못을 할 것만 같아 그때는 그것이 나에게는 전부였기에 그때는 그것이 나에게는 옳다고 믿는 그것이었기에 젊은 날 이해할 수 없던 많은 일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젊은 날의 나에게 말없이 다가가 한 번만 힘껏 안아주고 싶어 몸철학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인가?

어린시절 나는 부활절 달걀이 좋아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중학교 시절 신약성서에 감동받아 목사가 될까 고민했고 고등학교 이후로는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우리나라 교회는 그 많은 목사들이 망치고 우리나라 시는 그 많은 시인들이 망치고 지금 나는 목사도 시인도 아니지만 예수는 여전히 나의 관심사고 시는 여전히 나의 즐거움이고 그 많은 목사가 아니면 어떠랴 그 많은 시인이 아니면 어떠랴 교회를 망치는 목사들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면 되고 시를 망치는 시인들보다 시를 더 사랑하면 되지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인가? 몸철학